그녀는 어떤 중요한 일로 여정에 오른 것 같았다.
그녀는 큰 캐리어 세 개를 혼자서 카트에 담아 끌고 자카르타 수까르노-하따 공항 대한항공 발권창구에 줄을 섰고, 큰
캐리어 세 개부터 어깨에 맨 큰 명품모조 가방, 손목의 플라스틱 금빛시계까지 모든 것이 새로 산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보였다. 때때로 울어댄 블랙베리 스마트폰도 최신형에 액정과 키패드가 반짝거리는 '신삥'이었다. 다만 발가락을 끼워 신는 슬리퍼는 슈퍼에서 파는 흔한 것이었다. 겉옷으로 챙긴 청재킷이 짐챙기느라 카트에서 떨어져도 그녀는 옷을 털지 않았다. 발권대기 내내 신경이 날카로웠다. 발권창구가 열기도 전에 줄을 서서 누가 새치기를 하거나 자기가 뒤로 밀릴까봐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서라는 거냐, 여기 서는 거 맞냐"며 직원들에게 큰 소리로 묻고 또 물었다. 항공사 직원들은 이제 막 문을 연 발권창구 정돈을 하느라 분주하던 때였다. 다들 차분하게 기다리는 가운데 혼자 유독 목소리 크게 친절하게 인사를 하고 또 신경질적으로 질문을 해대던 그녀를 다시 만났다. 내 옆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한 가지 이상의 음식들에 알레르기가 있는 무슬림이라는 것을 알았다. 승무원이 그녀에게 다가가서 그녀가 이메일로 특별 주문한 메뉴를 준비하지 못했다며 양해를 구하고 다른 메뉴들을 권했기 때문이다. 곧 그녀가 인천을 경유해 샌프란시스코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최종 도착지가 어딥니까 손님?" "샌프란시스코." '샌프란시스코'하고 답하는 차분한 발음과 태도에 비장한 기색이 있었다.
서울에 도착해 카페에 앉아 대로변을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다가 문득 그녀가 생각났고 궁금했다. 그녀는 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걸까? 무슨 일로 가기에 그렇게 예민했던 걸까? 가만히 다시 기억을 떠올려보니 그녀는 <자카르타포스트> 정치부 기자 마가렛과 얼굴의 느낌이 좀 닮았다.
Monday, August 11, 2014
Tuesday, August 05, 2014
Roh Moohyun dan Jokowi
Sorak kemenangan menggema di kampus Chonnam National University di Gwangju, Korea Selatan di sebuah Desember petang musim dingin. Hari-hari itu Piala Dunia 2002 yang diselenggarakan di Korea dan Jepan. Sejak tim nasional Korea berhasil memecahkan rekor dengan masuk ke semifinal pada Juni 2002, sorakan penuh emangat dan teriakan-teriakan tak terduga yang menggema dari jalanan dan tempat-tempat umum menjadi peristiwa biasa. Tapi sorak sorai kegembiraan dari aula mahasiswa di Chonnam National University itu terjadi pada bulan Desember, enam bulan setelah demam piala dunia.
Pada 19 Desember 2002 adalah
hari pemilihan persiden ke sembilan di Korea Selatan. Sorakan kemenangan pada
petang hari itu adalah reaksi mahasiswa atas berita televise yang menyiarkan
pencalonan Roh Moohyun. Roh Moohyun – anak seorang petani miskin dan pengacara
namun hanya lulusan sekolah menengah atas ‘Busan Commercial High School’ untuk
aktivis pekerja dan hak asasi manusia, yang kemudian menjadi anggota dewan –
adalah figur sensional di panggung politik Korea selama 2002. Pria, 56 tahun
saat itu, memiliki pendukung yang sangat besar dari kalangan pengguna internet
muda atau generasi pasca demokratisasi 1980-an. Yang membuat para pemilih muda
tergerak mendukung Roh adalah kekalahannya yang berulang selama pemilihan umum.
Politik di Korea telah lama
terpolarisasi dalam model regionalisme barat dan timur – provinsi Cholla dan
Kyoungsang yang tak setara dalam hal pembangunan. Peta politik di negeri ini
terbelah menjadi oposisi di pihak barat dan timur sebagai pemerintahan atau
barat yang progresif dan timur yang konservatif. Roh, dari wilayah timur,
memasuki dunia politik setelah bergabung dengan Democratic Reunification Party
dan memenangi pemilu legislative pertama pada 1988. Dia menjadi terkenal
setelah melakukan mempermasalahkan dengan fakta-fakta tuduhan korupsi kepada
Chun Doohwan, mantan Presiden dari militer yang sangat berpengaruh.
Roh menyaksikan koalisi
politik antara partai oposisi yang ia dukung dengan partai penguasa pada 1990
hanya untuk memenangkan pemilu, yang ia anggap sebagai pengkhianatan terhadap
gerakan demokrasi. Dia memutuskan meninggalkan jalan mudah sebagai seorang
politikus. Dia mengubah partainya menjadi Partai Demokrasi berbasis Cholla yang
anti koalisi, bertarung di legislative dan memperebutkan kursi walikota Busan, kota pelabuhan di wilayah
Kyoungsang. Dia kalah empat pemilu perturut-turut pada 1992, 1995, 1996 dan
2000. Anehnya, banyak yang menganggap komitmen “bodoh”nya untuk tidak mau
berkompromi menandingi regionalisme sebagai impian segar dalam politik.
Pedukung Roh lantas membentuk fans club politik pertama di Korea yang
dinamai “Nosamo (orang yang mencintai Roh)”. Kelompok pendukung ini, yang
menggandeng banyak artis, secara sukarela menginisiasi proyek penggalangan dana
untuk kampanye presiden Roh yang tidak kaya dengan cara mendistribusikan
celengan babi berwarna kuning ke berbagai kalangan.
Roh Moohyun pada akhirnya
memenangi pemilihan presiden dan menempati posisi kepemimpinan tertinggi itu di
Korea Selatan. Pemerintahan Partisipasi bentukan Roh (2003-2008) menginisiasi
ide pembangunan nasional yang setara. Ia merelokasi ibukota administrative dari
Seoul yang sudah terlalu padat, yang sudah menjadi ibukota semenanjung Korea
Selatan lebih dari 600 tahun, ke Sejong di provinsi Chuncheong yang terletak di
pusat Korea Selatan. Untuk pertama kalinya, rakyat Korea bisa dengan mudah
mendengarkan pidato jujur presiden terkait persoalan negara, yang buat sebagian
orang dianggap ceroboh dan tidak pantas disampaikan pemimpin nasional.
Sorak sorai pendukung di Tugu
Proklamasi di Jakarta, pada petang 9 Juli lalu, setelah Jokowi mendeklarasikan
‘Kemenangan Rakyat Indonesia’ mengingatkan saya pada gelora sorai mahasiswa
yang saya rasakan di kampus di petang musim dingin 2002 lalu. Saat itu saya
tinggal di Gwangju, baru berusia 19 tahun; belum bisa memilih untuk Roh Moohyn
tapi mengamati aspirasi dari senior-senior dan kebanggaan yang menguar di
penjuru kampus. Lagi di Jakarta 2014, sekarang karena saya adalah warga negara
Korea, saya tak bisa berpartisipasi untuk memilih di momen perubahan demokrasi
yang menggairahkan ini, tetapi mengamati wajah-wajah bangga teman-teman saya
dan tawa bahagia di ruang berita Tempo.
by Seuki Lee
(Originally written in English )
Translation :Kartika
Proof reading/editing :Bag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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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one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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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servation,
opinion,
presidential election
Thursday, July 31, 2014
요피
그는 올해로 경력 14년차의 기자. 인도네시아 시사주간 <뗌뽀>에서 처음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뗌뽀> 사무실이 아직 자카르타 프로클라마시 거리 72에 있던 시절, 또다른 뗌뽀 기자 소개를 통해서였다. 그 날은 내가 자카르타에 도착한 지 사흘쯤 되는, 영문 모른 채 모든 것에 눈을 반짝이는 그런 최초의 날들이었다. 그는 로비에 앉아 소파 옆에 비치된 그 주치 <뗌뽀>를 읽고 있었고, 2층 편집부에서 내려오는 나와 친구를 보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당시 일간 <코란 뗌뽀> 사회부 경찰기자 요피의 첫인상이었다. 우리는 걸어서 메가리아로 이동했고, 그 곳에서 중국음식을 시켜 먹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친구가 나를 요피와 만나게 했던 이유는 '둘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러니까 한국식으로 해석하면 '소개팅'이었다.
요피는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이다. 프로클라마시에서의 첫 만남 이후 만남을 거듭하면서 알게된 그의 이름 '요피'의 유래는 중국어 이름 '有飛(youfei)'를 인도네시아식(?)으로 순화한 것이었다. 인도네시아를 32년간 철권통치한 수하르토 정권에서 중국계는 중국어를 사용할 수 없었고, 이름도 모두 인도네시아식으로 바꿨는데, 요피의 이름도 그렇게 탄생한 역사적 사연이 있는 이름이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이름이 '날개가 있다' '날다'는 의미로 지어진 것을 알았다.
그는 고춧가루와 고추를 먹지 않는다. 매운 것을 먹으면 위가 문제를 일으킨다는 이유였다. 자극적인 양념의 음식을 먹을 때마다 위가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기자생활을 하며 생긴 예민함에 더해 늘 앉아서 기사쓰고 편집하며 쌓인 소화기능 장애 탓이었다. 그는 '나시고렝'에 들어간 고추를 걷어내고, '미아얌'에 들어간 초록 채소 카일란을 걷어내는 것으로 밥먹는 순서를 시작했다. 보통 설탕을 넣지 않은 뜨거운 홍차 '떼따와르' 혹은 병에 넣어 파는 설탕을 첨가한 홍차 '떼 보똘'을 식사용 음료로 주문했다.
그가 오토바이로 나를 싣고 찾아간 곳들은 자카르타의 차이나타운, '꼬따'와 그 인근이었다. 그 곳에서 처음 돼지고기 '사떼'를 맛봤고, 아는 사람만 찾아가는 후미진 골목의 '미아얌'집에서 땀흘리며 밥을 나눠 먹었다. 천주교 신자인 그를 따라 자카르타에서 처음 성당에 가서 천장이 훌쩍 높은 서늘한 성당 안에서 그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봤다. 무엇을 기도했나 물으니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했다고 했다. 그의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한 자카르타의 주요 거리에서 작은 박스와 깡통을 들고 구걸하는 10살 전후의 아이들을 봤다. 아이들은 차가 다닐 땐 중앙분리대에서 기다리다가 빨간불이 되면 신호대기하는 오토바이와 자동차, 버스, 택시 주위로 몰려들어 뜨거운 아스팔트 열기와 자동차 오토바이 매연 속에서 사람들의 눈을 보며 손에 든 깡통을 내밀었다. 그럴 때마다, 요피는 헬멧 쓴 고개를 흔들었고 때로는 사회가 이래서는 안된다는 말을 했다.
그의 '이래서는 안된다'는 말을 또 들었던 것은 교통체증이 잦은 대로변 도로 보수+하수도 보수 공사현장을 지날 때였다. 헬멧 쓴 고개를 흔들며 요피는 '자카르타가 안그래도 막히는 줄을 알면서 평일 러시아워에 판벌리고 공사하는 게 말이 되냐'고 말했다. 그는 앞서가는 오토바이가 급정거를 하거나 무리한 커브를 돌 때, 끼어들거나 폭주를 할 때에도, 대로의 한 가운데가 움푹 파인 모습을 목격할 때에도 헬멧 쓴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늘상 조금 예민했고, 엄격했고, 취재와 기사로 고민에 빠져 있었으며 밤 늦게까지 텅빈 사무실을 지키며 전화인터뷰 대기를 했다. 농담으로 긴장푸는 <뗌뽀> 편집팀 사이에서도 그가 농담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진지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요피는 내가 무엇을 묻던 진지하게 답해주는 사람이었다. 자카르타에 온 지 두 달이 조금 지난 어느 날, 그는 나에게 기자로 성장하고 살아남기 위한 세 가지 기본기를 말해주었다. 취재원을 만날 때 같이 가 통역을 해줬고, 인도네시아어로 받은 인터뷰를 영어로 번역해줬고 취재원을 찾지 못할 때 함께 수소문했다. 그 과정 내내 한참 후배인 나의 취재 방향과 결정을 존중해줬고, 진지하게 지원했다.
그는 2012년 초, 인도네시아 재벌 중 하나가 인수한 온라인 매체 <더띡>으로 <뗌뽀> 기자 20여명이 대거 빠져나갈 때 함께 빠져나가며 <뗌뽀> 11년을 졸업했다. 나는 '가지 말라'고 했고 그는 '다른 선택이 없다'고 했다. 6개월 후 그는 야후메신저로 광주에 휴가 가 있던 나를 찾았고, 자카르타로 돌아와 만났을 때 '더띡 생활이 처음 의욕적으로 품었던 큰 뜻을 실현하기엔 거리가 있더라'고 했다. 그는 이상주의자였고, 언론혁명을 꿈꾸고 있었고 그 꿈을 재력/인력을 투자하는 <더띡>에서 이루고 싶어했다. 업계에서 손꼽히는 12년 경력의 기자가 품은 타협할 줄 모르는 이상적인 꿈들은 안타까웠고 아름다웠다.
끝내 <더띡>을 떠난 그는<콤파스TV>에서 뉴스팀장/프로듀서로 새로운 시작을 했다. 그는 회사를 옮긴 후 그토록 오랜동안 계획했던 조상의 고향 '중국'방문을 했고, 행복한 모습으로 <콤파스 TV> 일을 시작했다. '둥지' <뗌뽀>를 떠난 후 <더띡>에서 좀 헤맸지만 <콤파스TV>에서 제자리를 찾은 그는 자신감도 찾아갔다.
지난 7월 5일, 인도네시아 대선 후보간 마지막 생방송 TV토론 현장을 취재할 때 요피를 만났다. 당시 생방송 TV 중계를 맡은 <콤파스 TV> 현장 책임자로 나왔다가 프레스룸에 앉아 토론 내용을 모니터하던 나를 발견하고, 내 옆에 앉아 인사를 건넨 그는 마지막으로 만난 2013년 언젠가보다 더 여윈 모습, 언제나처럼 진지한 태도였고, 맨처음 프로클라마시에서 만난 2011년 9월 어느 날처럼 환한 미소로 나를 향해 웃었다.
요피는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이다. 프로클라마시에서의 첫 만남 이후 만남을 거듭하면서 알게된 그의 이름 '요피'의 유래는 중국어 이름 '有飛(youfei)'를 인도네시아식(?)으로 순화한 것이었다. 인도네시아를 32년간 철권통치한 수하르토 정권에서 중국계는 중국어를 사용할 수 없었고, 이름도 모두 인도네시아식으로 바꿨는데, 요피의 이름도 그렇게 탄생한 역사적 사연이 있는 이름이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이름이 '날개가 있다' '날다'는 의미로 지어진 것을 알았다.
그는 고춧가루와 고추를 먹지 않는다. 매운 것을 먹으면 위가 문제를 일으킨다는 이유였다. 자극적인 양념의 음식을 먹을 때마다 위가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기자생활을 하며 생긴 예민함에 더해 늘 앉아서 기사쓰고 편집하며 쌓인 소화기능 장애 탓이었다. 그는 '나시고렝'에 들어간 고추를 걷어내고, '미아얌'에 들어간 초록 채소 카일란을 걷어내는 것으로 밥먹는 순서를 시작했다. 보통 설탕을 넣지 않은 뜨거운 홍차 '떼따와르' 혹은 병에 넣어 파는 설탕을 첨가한 홍차 '떼 보똘'을 식사용 음료로 주문했다.
그가 오토바이로 나를 싣고 찾아간 곳들은 자카르타의 차이나타운, '꼬따'와 그 인근이었다. 그 곳에서 처음 돼지고기 '사떼'를 맛봤고, 아는 사람만 찾아가는 후미진 골목의 '미아얌'집에서 땀흘리며 밥을 나눠 먹었다. 천주교 신자인 그를 따라 자카르타에서 처음 성당에 가서 천장이 훌쩍 높은 서늘한 성당 안에서 그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봤다. 무엇을 기도했나 물으니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했다고 했다. 그의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한 자카르타의 주요 거리에서 작은 박스와 깡통을 들고 구걸하는 10살 전후의 아이들을 봤다. 아이들은 차가 다닐 땐 중앙분리대에서 기다리다가 빨간불이 되면 신호대기하는 오토바이와 자동차, 버스, 택시 주위로 몰려들어 뜨거운 아스팔트 열기와 자동차 오토바이 매연 속에서 사람들의 눈을 보며 손에 든 깡통을 내밀었다. 그럴 때마다, 요피는 헬멧 쓴 고개를 흔들었고 때로는 사회가 이래서는 안된다는 말을 했다.
그의 '이래서는 안된다'는 말을 또 들었던 것은 교통체증이 잦은 대로변 도로 보수+하수도 보수 공사현장을 지날 때였다. 헬멧 쓴 고개를 흔들며 요피는 '자카르타가 안그래도 막히는 줄을 알면서 평일 러시아워에 판벌리고 공사하는 게 말이 되냐'고 말했다. 그는 앞서가는 오토바이가 급정거를 하거나 무리한 커브를 돌 때, 끼어들거나 폭주를 할 때에도, 대로의 한 가운데가 움푹 파인 모습을 목격할 때에도 헬멧 쓴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늘상 조금 예민했고, 엄격했고, 취재와 기사로 고민에 빠져 있었으며 밤 늦게까지 텅빈 사무실을 지키며 전화인터뷰 대기를 했다. 농담으로 긴장푸는 <뗌뽀> 편집팀 사이에서도 그가 농담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진지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요피는 내가 무엇을 묻던 진지하게 답해주는 사람이었다. 자카르타에 온 지 두 달이 조금 지난 어느 날, 그는 나에게 기자로 성장하고 살아남기 위한 세 가지 기본기를 말해주었다. 취재원을 만날 때 같이 가 통역을 해줬고, 인도네시아어로 받은 인터뷰를 영어로 번역해줬고 취재원을 찾지 못할 때 함께 수소문했다. 그 과정 내내 한참 후배인 나의 취재 방향과 결정을 존중해줬고, 진지하게 지원했다.
그는 2012년 초, 인도네시아 재벌 중 하나가 인수한 온라인 매체 <더띡>으로 <뗌뽀> 기자 20여명이 대거 빠져나갈 때 함께 빠져나가며 <뗌뽀> 11년을 졸업했다. 나는 '가지 말라'고 했고 그는 '다른 선택이 없다'고 했다. 6개월 후 그는 야후메신저로 광주에 휴가 가 있던 나를 찾았고, 자카르타로 돌아와 만났을 때 '더띡 생활이 처음 의욕적으로 품었던 큰 뜻을 실현하기엔 거리가 있더라'고 했다. 그는 이상주의자였고, 언론혁명을 꿈꾸고 있었고 그 꿈을 재력/인력을 투자하는 <더띡>에서 이루고 싶어했다. 업계에서 손꼽히는 12년 경력의 기자가 품은 타협할 줄 모르는 이상적인 꿈들은 안타까웠고 아름다웠다.
끝내 <더띡>을 떠난 그는<콤파스TV>에서 뉴스팀장/프로듀서로 새로운 시작을 했다. 그는 회사를 옮긴 후 그토록 오랜동안 계획했던 조상의 고향 '중국'방문을 했고, 행복한 모습으로 <콤파스 TV> 일을 시작했다. '둥지' <뗌뽀>를 떠난 후 <더띡>에서 좀 헤맸지만 <콤파스TV>에서 제자리를 찾은 그는 자신감도 찾아갔다.
지난 7월 5일, 인도네시아 대선 후보간 마지막 생방송 TV토론 현장을 취재할 때 요피를 만났다. 당시 생방송 TV 중계를 맡은 <콤파스 TV> 현장 책임자로 나왔다가 프레스룸에 앉아 토론 내용을 모니터하던 나를 발견하고, 내 옆에 앉아 인사를 건넨 그는 마지막으로 만난 2013년 언젠가보다 더 여윈 모습, 언제나처럼 진지한 태도였고, 맨처음 프로클라마시에서 만난 2011년 9월 어느 날처럼 환한 미소로 나를 향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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