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October 20, 2012

여자의 일생

아무 생각없이 관찰하던 관계들 속에서 여자의 일생을 생각했다. 모파상의 그 유명한 이야기를 떠올리겠지만.

여자가 남자와 함께 있을 때, 관계 안에 있을 때, 둘의 거래는 매춘을 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그런 의문이 진심으로 생겨난 밤이다. 여자에게 결혼은 경제적 생존의 문제고 선택이라던 2년 전의 대화와 2주 전의 대화가 오늘 저녁 한국식당에서 겹쳤다. 동등한 부부가 아니라 집안의 얼굴 마담으로 남편의 여자로, 손님이 찾아오면 웃으며 응대해야 하고, 불편한 자리나 편한 자리나 자기 선택과 관계없이 나가야 할 자리면 친절한 웃음을 쓰고 나가 앉아 자리를 지켜야 하는, 진심이 아닌 웃음을 웃는 것은, 얼마나 씁쓸하고 불쾌한 일인가. 이게 성노동자의 삶과 무엇이 다른가. 직접적인 성관계를 매개하는가가 성노동과 매춘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자의 웃음을 파는 것, 여자의 상냥한 배려와 태도를 기대하는 남자들에게 그것을 주는 것도 성노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남자가 일방적으로 기대하는 여자의 성역할을 채워주는(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것, 그것도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일종의 매춘이라고 생각한다. 혼인 관계에 있는가 연인 관계에 있는가 같은 공식적인 이름표는 중요하지 않다. 남자가 경제적 몫을 지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한 여자의 성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면 부부관계라도 매춘 아닌가.

그동안 몇몇 남자들을 만나면서 느꼈던 찝찝함이 무엇인가 따져보니 오늘에야 답이 나왔다. 나는 매춘을 하고 있었던 거다. 나는 웃어주고 상냥하게 챙겨주고 그를 기쁘게 하면, 그는 돈을 지불하는 것.

그런 게 여자의 일생이라고 소설로 이론으로 까발렸던 게 언제 적인데 아직도 일상에선 달라진 게 없다. 무감각해서 그렇다. 여자의 일생이 남자의 정서적 신체적 만족을 위한 여성으로서의 성역할에 그쳐서 되겠니. 제3의 성도, 제4의 성도, 그 어떤 혁명적인 성개념도 일상의 무감각을 먼저 넘어서지 않으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