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une 25, 2014

리처드

리처드는 늘 산 미구엘을 마신다. 한 번 자리에 앉아 맥주를 마시기 시작하면 보통 4-5시간이다. 여럿이 어울려 마시는 것도 아니고 혼자 바에 앉아 자기 집 책상 앞에 앉아 맥북 들여다 보며 홀짝홀짝 마신다. 편집팀에 의하면 마감 직전에 잔뜩 술에 취해 사무실에 출근해 한참 헤롱대며 의자에 누워 잠을 자다가 일어나 순식간에 기가 막힌 제목을 뽑아내고는 밤샘 마감 후 판본이 인쇄소로 넘어가면 모두 퇴근한 뒤에도 한참 맥북 앞에 앉아 있다가 맥주를 마시러 간다. 팀 대부분이 그와 이야기할 때는 그의 영어를 알아듣기 어렵다고 말한다. 디카는 그가 말을 '먹으면서' 하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거의 못 알아듣겠다고 하고, 데브라는 그가 웅얼웅얼해서 역시 거의 못알아 듣는다고 했다. 데브라는 편집 중 그에게 확인할 것이 있어 전화 통화를 해야 할 때 그의 말을 알아 들으려 오케이 오케이 해가며 경청했지만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고 했다. 나도 맞장구치며 비슷한 '소통장애' 경험을 말했다. 그와 얘기할 땐 늘 pardon? sorry? what?이 내가 하는 말의 절반이라고 웃으며 과장해 말했다. 이 말을 듣던 데브라와 아만다는 즐거워 했다.

리처드는 뗌뽀에서 14년째 카피라이터로 일하고 있다. 그는 영국인이다. 고향이 어딘지, 언젠가 그가 산 미구엘 손에 들고 맥북 앞에 두고 스포츠 경기 중계 TV들이 벽벽에 걸린 스포츠맨 바에서 얘기해줬던 적이 있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에겐 기회가 되면 발리에 초대해 휴가를 선물하고 싶은 누나와 어머니가 있다. 지난해 그러니까 2013년 5월엔 드디어 누나와 어머니를 함께 초대할 수 있는 돈이 모아졌다고, 그는 설레며 나에게 말했는데 끝내는 어떤 사정에서인지 계획대로 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특별한 취미가 없다. 바나 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맥북을 붙잡고 음악을 듣든 동영상을 보든 기사들을 읽든 좋아하는 축구팀의 경기일정과 결과를 보든. 몇 년 전 7-8년을 사귀던 인도네시아인 여자친구와 헤어진 후 연애사도 심심한 것 같았다. 전'여친'은 스포츠맨 바에서 일하던 바텐더였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14년간 함께 주말마다 편집을 한 영어판 편집장 율리는 그를 자카르타에서는 잘란 작사 밖에 모르고 인도네시아어도 거의 하지 못하며 고향 영국에도 몇 년째 돌아가지 않으며 자카르타 밖이라고 가는 곳은 발리 뿐이라고 했다. 그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 건강이 안좋다는 등, 그는 거의 참석하지 않는 편집회의에서 여러번 말했다. 영어판 부편집장 헤르민은, 자주 편집 마감에 임박해도 전화가 불통이거나 행방을 알 수 없어져 팀을 패닉에 빠뜨리는 리처드를(그의 이름을 줄여 RB라고 부르는데) 이번주 마감의 '요주의 인물'로 지목한다. RB만 제 시간에 출근하면 문제가 없다는 말을 한다. 편집 마감 일정이 당겨지거나 특집기사 양이 많아 편집팀에서 비상이 걸리면 헤르민은 늘 RB가 관건이라며 그와 주로 소통하는 편집비서 데위에게 그에게 잘 설명하고 꼭 제시간에 올 수 있게 하라고 당부 또 당부다. 그런 이야기가 오가는 회의석에 앉아 있으면 RB는 이 팀의 대단한 골칫거리, 영원한 과제, 구제불능의 속썩이는 존재가 된다.

그러면 왜 그런 그와 일하는가. 자카르타에 영어원어민들도 많은데. 언젠가 율리가 말했다. "제목을 리처드처럼 뽑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는 그의 카피라이트가 늘 좋고, 결과물에 항상 만족한다." 이어 율리는 그가 어떻게 제목을 뽑는지, 표지문구와 사진, 일러스트레이션 고르는 최종 단계에 대해서도 말한 적이 있다. 그가 창의적이고 재기넘치는 제목 뽑기의 밑감으로 읽고 들여다 보는 것들, 참고하는 것들에 대해서. 마감 때마다 그의 옆자리를 지키는 데위는 그가 주간지 기사들이나 시사와 전혀 관계없는 몇 개의 디자인 사이트, 영감있는 홈페이지 등에 자주 들어간다고 했다. 편집팀에서 가까이 지켜본 사람들의 관찰을 종합하면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디어를 얻는 데 할애하며 아주 집중해 빠른 시간 안에 독자의 뇌를 깨우는 제목을 뽑아내는 카피라이터다.

그는 노란 테이프로 칭칭 감싼 무선 마우스를 쓰고 있는데 새것을 사다가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정향이 많이 들어가 단맛이 나는 유명한 토산담배 '구당가람'을 피운다. 그는 인도네시아에서 발행되는 두 개의 영어일간 자카르타포스트와 자카르타글로브에 대해, 자카르타글로브는 에디토리얼 빼고 볼 게 없다고 잘라 말했고 자카르타포스트에 대해선 그저 괜찮은 신문이라고 두루뭉술 넘어갔다. 그가 매주 편집회의에 나오지 않는 이유는 가장 중요한 그 주 발행호의 전체 편집방향과 레이아웃, 표지이야기와 표지의 문구/제목/디자인 등에 대해서는 정작 단 한 번도 논의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회의에선 실리게 될 기사만 선별하고 발제하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 (140115 JKT 아침)

뗌뽀 영어판 제1444호가 나온 이번주까지, 1444개의 놀라운 표지 제목을 뽑아오고 있으며 누구도 리처드 없는 뗌뽀 영어판을 생각하지 못할 것 같다. 그는 뗌뽀가 아직 잘란 프로클라마시 72에 있던 시절, 마감 한창인 편집팀 중간에 앉아 멀뚱거리던 자카르타 2주차 한국인 인턴기자에게 두꺼운 치즈만 넣은 호밀빵 샌드위치를 건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