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ly 31, 2014

요피

그는 올해로 경력 14년차의 기자. 인도네시아 시사주간 <뗌뽀>에서 처음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뗌뽀> 사무실이 아직 자카르타 프로클라마시 거리 72에 있던 시절, 또다른 뗌뽀 기자 소개를 통해서였다. 그 날은 내가 자카르타에 도착한 지 사흘쯤 되는, 영문 모른 채 모든 것에 눈을 반짝이는 그런 최초의 날들이었다. 그는 로비에 앉아 소파 옆에 비치된 그 주치 <뗌뽀>를 읽고 있었고, 2층 편집부에서 내려오는 나와 친구를 보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당시 일간 <코란 뗌뽀> 사회부 경찰기자 요피의 첫인상이었다. 우리는 걸어서 메가리아로 이동했고, 그 곳에서 중국음식을 시켜 먹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친구가 나를 요피와 만나게 했던 이유는 '둘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러니까 한국식으로 해석하면 '소개팅'이었다.

요피는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이다. 프로클라마시에서의 첫 만남 이후 만남을 거듭하면서 알게된 그의 이름 '요피'의 유래는 중국어 이름 '有飛(youfei)'를 인도네시아식(?)으로 순화한 것이었다. 인도네시아를 32년간 철권통치한 수하르토 정권에서 중국계는 중국어를 사용할 수 없었고, 이름도 모두 인도네시아식으로 바꿨는데, 요피의 이름도 그렇게 탄생한 역사적 사연이 있는 이름이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이름이 '날개가 있다' '날다'는 의미로 지어진 것을 알았다.

그는 고춧가루와 고추를 먹지 않는다. 매운 것을 먹으면 위가 문제를 일으킨다는 이유였다. 자극적인 양념의 음식을 먹을 때마다 위가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기자생활을 하며 생긴 예민함에 더해 늘 앉아서 기사쓰고 편집하며 쌓인 소화기능 장애 탓이었다. 그는 '나시고렝'에 들어간 고추를 걷어내고, '미아얌'에 들어간 초록 채소 카일란을 걷어내는 것으로 밥먹는 순서를 시작했다. 보통 설탕을 넣지 않은 뜨거운 홍차 '떼따와르' 혹은 병에 넣어 파는 설탕을 첨가한 홍차 '떼 보똘'을 식사용 음료로 주문했다.

그가 오토바이로 나를 싣고 찾아간 곳들은 자카르타의 차이나타운, '꼬따'와 그 인근이었다. 그 곳에서 처음 돼지고기 '사떼'를 맛봤고, 아는 사람만 찾아가는 후미진 골목의 '미아얌'집에서 땀흘리며 밥을 나눠 먹었다. 천주교 신자인 그를 따라 자카르타에서 처음 성당에 가서 천장이 훌쩍 높은 서늘한 성당 안에서 그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봤다. 무엇을 기도했나 물으니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했다고 했다. 그의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한 자카르타의 주요 거리에서 작은 박스와 깡통을 들고 구걸하는 10살 전후의 아이들을 봤다. 아이들은 차가 다닐 땐 중앙분리대에서 기다리다가 빨간불이 되면 신호대기하는 오토바이와 자동차, 버스, 택시 주위로 몰려들어 뜨거운 아스팔트 열기와 자동차 오토바이 매연 속에서 사람들의 눈을 보며 손에 든 깡통을 내밀었다. 그럴 때마다, 요피는 헬멧 쓴 고개를 흔들었고 때로는 사회가 이래서는 안된다는 말을 했다.

그의 '이래서는 안된다'는 말을 또 들었던 것은 교통체증이 잦은 대로변 도로 보수+하수도 보수 공사현장을 지날 때였다. 헬멧 쓴 고개를 흔들며 요피는 '자카르타가 안그래도 막히는 줄을 알면서 평일 러시아워에 판벌리고 공사하는 게 말이 되냐'고 말했다. 그는 앞서가는 오토바이가 급정거를 하거나 무리한 커브를 돌 때, 끼어들거나 폭주를 할 때에도, 대로의 한 가운데가 움푹 파인 모습을 목격할 때에도 헬멧 쓴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늘상 조금 예민했고, 엄격했고, 취재와 기사로 고민에 빠져 있었으며 밤 늦게까지 텅빈 사무실을 지키며 전화인터뷰 대기를 했다. 농담으로 긴장푸는 <뗌뽀> 편집팀 사이에서도 그가 농담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진지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요피는 내가 무엇을 묻던 진지하게 답해주는 사람이었다. 자카르타에 온 지 두 달이 조금 지난 어느 날, 그는 나에게 기자로 성장하고 살아남기 위한 세 가지 기본기를 말해주었다. 취재원을 만날 때 같이 가 통역을 해줬고, 인도네시아어로 받은 인터뷰를 영어로 번역해줬고 취재원을 찾지 못할 때 함께 수소문했다. 그 과정 내내 한참 후배인 나의 취재 방향과 결정을 존중해줬고, 진지하게 지원했다.

그는 2012년 초, 인도네시아 재벌 중 하나가 인수한 온라인 매체 <더띡>으로 <뗌뽀> 기자 20여명이 대거 빠져나갈 때 함께 빠져나가며 <뗌뽀> 11년을 졸업했다. 나는 '가지 말라'고 했고 그는 '다른 선택이 없다'고 했다. 6개월 후 그는 야후메신저로 광주에 휴가 가 있던 나를 찾았고, 자카르타로 돌아와 만났을 때 '더띡 생활이 처음 의욕적으로 품었던 큰 뜻을 실현하기엔 거리가 있더라'고 했다. 그는 이상주의자였고, 언론혁명을 꿈꾸고 있었고 그 꿈을 재력/인력을 투자하는 <더띡>에서 이루고 싶어했다. 업계에서 손꼽히는 12년 경력의 기자가 품은 타협할 줄 모르는 이상적인 꿈들은 안타까웠고 아름다웠다.

끝내 <더띡>을 떠난 그는<콤파스TV>에서 뉴스팀장/프로듀서로 새로운 시작을 했다. 그는 회사를 옮긴 후 그토록 오랜동안 계획했던 조상의 고향 '중국'방문을 했고, 행복한 모습으로 <콤파스 TV> 일을 시작했다. '둥지' <뗌뽀>를 떠난 후 <더띡>에서 좀 헤맸지만 <콤파스TV>에서 제자리를 찾은 그는 자신감도 찾아갔다.

지난 7월 5일, 인도네시아 대선 후보간 마지막 생방송 TV토론 현장을 취재할 때 요피를 만났다. 당시 생방송 TV 중계를 맡은 <콤파스 TV> 현장 책임자로 나왔다가 프레스룸에 앉아 토론 내용을 모니터하던 나를 발견하고, 내 옆에 앉아 인사를 건넨 그는 마지막으로 만난 2013년 언젠가보다 더 여윈 모습, 언제나처럼 진지한 태도였고, 맨처음 프로클라마시에서 만난 2011년 9월 어느 날처럼 환한 미소로 나를 향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