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August 11, 2014

핑크 체크무늬 셔츠의 그녀

그녀는 어떤 중요한 일로 여정에 오른 것 같았다.

그녀는 큰 캐리어 세 개를 혼자서 카트에 담아 끌고 자카르타 수까르노-하따 공항 대한항공 발권창구에 줄을 섰고, 큰 캐리어 세 개부터 어깨에 맨 큰 명품모조 가방, 손목의 플라스틱 금빛시계까지 모든 것이 새로 산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보였다. 때때로 울어댄 블랙베리 스마트폰도 최신형에 액정과 키패드가 반짝거리는 '신삥'이었다. 다만 발가락을 끼워 신는 슬리퍼는 슈퍼에서 파는 흔한 것이었다. 겉옷으로 챙긴 청재킷이 짐챙기느라 카트에서 떨어져도 그녀는 옷을 털지 않았다. 발권대기 내내 신경이 날카로웠다. 발권창구가 열기도 전에 줄을 서서 누가 새치기를 하거나 자기가 뒤로 밀릴까봐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서라는 거냐, 여기 서는 거 맞냐"며 직원들에게 큰 소리로 묻고 또 물었다. 항공사 직원들은 이제 막 문을 연 발권창구 정돈을 하느라 분주하던 때였다. 다들 차분하게 기다리는 가운데 혼자 유독 목소리 크게 친절하게 인사를 하고 또 신경질적으로 질문을 해대던 그녀를 다시 만났다. 내 옆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한 가지 이상의 음식들에 알레르기가 있는 무슬림이라는 것을 알았다. 승무원이 그녀에게 다가가서 그녀가 이메일로 특별 주문한 메뉴를 준비하지 못했다며 양해를 구하고 다른 메뉴들을 권했기 때문이다. 곧 그녀가 인천을 경유해 샌프란시스코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최종 도착지가 어딥니까 손님?" "샌프란시스코." '샌프란시스코'하고 답하는 차분한 발음과 태도에 비장한 기색이 있었다.

서울에 도착해 카페에 앉아 대로변을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다가 문득 그녀가 생각났고 궁금했다. 그녀는 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걸까? 무슨 일로 가기에 그렇게 예민했던 걸까? 가만히 다시 기억을 떠올려보니 그녀는 <자카르타포스트> 정치부 기자 마가렛과 얼굴의 느낌이 좀 닮았다.

Tuesday, August 05, 2014

Roh Moohyun dan Jokowi


Sorak kemenangan menggema di kampus Chonnam National University di Gwangju, Korea Selatan di sebuah Desember petang musim dingin. Hari-hari itu Piala Dunia 2002 yang diselenggarakan di Korea dan Jepan. Sejak tim nasional Korea berhasil memecahkan rekor dengan masuk ke semifinal pada Juni 2002, sorakan penuh emangat dan teriakan-teriakan tak terduga yang menggema dari jalanan dan tempat-tempat umum menjadi peristiwa biasa. Tapi sorak sorai kegembiraan dari aula mahasiswa di Chonnam National University itu terjadi pada bulan Desember, enam bulan setelah demam piala dunia.

Pada 19 Desember 2002 adalah hari pemilihan persiden ke sembilan di Korea Selatan. Sorakan kemenangan pada petang hari itu adalah reaksi mahasiswa atas berita televise yang menyiarkan pencalonan Roh Moohyun. Roh Moohyun – anak seorang petani miskin dan pengacara namun hanya lulusan sekolah menengah atas ‘Busan Commercial High School’ untuk aktivis pekerja dan hak asasi manusia, yang kemudian menjadi anggota dewan – adalah figur sensional di panggung politik Korea selama 2002. Pria, 56 tahun saat itu, memiliki pendukung yang sangat besar dari kalangan pengguna internet muda atau generasi pasca demokratisasi 1980-an. Yang membuat para pemilih muda tergerak mendukung Roh adalah kekalahannya yang berulang selama pemilihan umum.

Politik di Korea telah lama terpolarisasi dalam model regionalisme barat dan timur – provinsi Cholla dan Kyoungsang yang tak setara dalam hal pembangunan. Peta politik di negeri ini terbelah menjadi oposisi di pihak barat dan timur sebagai pemerintahan atau barat yang progresif dan timur yang konservatif. Roh, dari wilayah timur, memasuki dunia politik setelah bergabung dengan Democratic Reunification Party dan memenangi pemilu legislative pertama pada 1988. Dia menjadi terkenal setelah melakukan mempermasalahkan dengan fakta-fakta tuduhan korupsi kepada Chun Doohwan, mantan Presiden dari militer yang sangat berpengaruh.

Roh menyaksikan koalisi politik antara partai oposisi yang ia dukung dengan partai penguasa pada 1990 hanya untuk memenangkan pemilu, yang ia anggap sebagai pengkhianatan terhadap gerakan demokrasi. Dia memutuskan meninggalkan jalan mudah sebagai seorang politikus. Dia mengubah partainya menjadi Partai Demokrasi berbasis Cholla yang anti koalisi, bertarung di legislative dan memperebutkan kursi walikota Busan, kota pelabuhan di wilayah Kyoungsang. Dia kalah empat pemilu perturut-turut pada 1992, 1995, 1996 dan 2000. Anehnya, banyak yang menganggap komitmen “bodoh”nya untuk tidak mau berkompromi menandingi regionalisme sebagai impian segar dalam politik. Pedukung Roh lantas membentuk fans club politik pertama di Korea yang dinamai “Nosamo (orang yang mencintai Roh)”. Kelompok pendukung ini, yang menggandeng banyak artis, secara sukarela menginisiasi proyek penggalangan dana untuk kampanye presiden Roh yang tidak kaya dengan cara mendistribusikan celengan babi berwarna kuning ke berbagai kalangan.

Roh Moohyun pada akhirnya memenangi pemilihan presiden dan menempati posisi kepemimpinan tertinggi itu di Korea Selatan. Pemerintahan Partisipasi bentukan Roh (2003-2008) menginisiasi ide pembangunan nasional yang setara. Ia merelokasi ibukota administrative dari Seoul yang sudah terlalu padat, yang sudah menjadi ibukota semenanjung Korea Selatan lebih dari 600 tahun, ke Sejong di provinsi Chuncheong yang terletak di pusat Korea Selatan. Untuk pertama kalinya, rakyat Korea bisa dengan mudah mendengarkan pidato jujur presiden terkait persoalan negara, yang buat sebagian orang dianggap ceroboh dan tidak pantas disampaikan pemimpin nasional.

Sorak sorai pendukung di Tugu Proklamasi di Jakarta, pada petang 9 Juli lalu, setelah Jokowi mendeklarasikan ‘Kemenangan Rakyat Indonesia’ mengingatkan saya pada gelora sorai mahasiswa yang saya rasakan di kampus di petang musim dingin 2002 lalu. Saat itu saya tinggal di Gwangju, baru berusia 19 tahun; belum bisa memilih untuk Roh Moohyn tapi mengamati aspirasi dari senior-senior dan kebanggaan yang menguar di penjuru kampus. Lagi di Jakarta 2014, sekarang karena saya adalah warga negara Korea, saya tak bisa berpartisipasi untuk memilih di momen perubahan demokrasi yang menggairahkan ini, tetapi mengamati wajah-wajah bangga teman-teman saya dan tawa bahagia di ruang berita Tempo. 

by Seuki Lee
(Originally written in English )
Translation :Kartika
Proof reading/editing :Bagja

Thursday, July 31, 2014

요피

그는 올해로 경력 14년차의 기자. 인도네시아 시사주간 <뗌뽀>에서 처음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뗌뽀> 사무실이 아직 자카르타 프로클라마시 거리 72에 있던 시절, 또다른 뗌뽀 기자 소개를 통해서였다. 그 날은 내가 자카르타에 도착한 지 사흘쯤 되는, 영문 모른 채 모든 것에 눈을 반짝이는 그런 최초의 날들이었다. 그는 로비에 앉아 소파 옆에 비치된 그 주치 <뗌뽀>를 읽고 있었고, 2층 편집부에서 내려오는 나와 친구를 보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당시 일간 <코란 뗌뽀> 사회부 경찰기자 요피의 첫인상이었다. 우리는 걸어서 메가리아로 이동했고, 그 곳에서 중국음식을 시켜 먹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친구가 나를 요피와 만나게 했던 이유는 '둘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러니까 한국식으로 해석하면 '소개팅'이었다.

요피는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이다. 프로클라마시에서의 첫 만남 이후 만남을 거듭하면서 알게된 그의 이름 '요피'의 유래는 중국어 이름 '有飛(youfei)'를 인도네시아식(?)으로 순화한 것이었다. 인도네시아를 32년간 철권통치한 수하르토 정권에서 중국계는 중국어를 사용할 수 없었고, 이름도 모두 인도네시아식으로 바꿨는데, 요피의 이름도 그렇게 탄생한 역사적 사연이 있는 이름이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이름이 '날개가 있다' '날다'는 의미로 지어진 것을 알았다.

그는 고춧가루와 고추를 먹지 않는다. 매운 것을 먹으면 위가 문제를 일으킨다는 이유였다. 자극적인 양념의 음식을 먹을 때마다 위가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기자생활을 하며 생긴 예민함에 더해 늘 앉아서 기사쓰고 편집하며 쌓인 소화기능 장애 탓이었다. 그는 '나시고렝'에 들어간 고추를 걷어내고, '미아얌'에 들어간 초록 채소 카일란을 걷어내는 것으로 밥먹는 순서를 시작했다. 보통 설탕을 넣지 않은 뜨거운 홍차 '떼따와르' 혹은 병에 넣어 파는 설탕을 첨가한 홍차 '떼 보똘'을 식사용 음료로 주문했다.

그가 오토바이로 나를 싣고 찾아간 곳들은 자카르타의 차이나타운, '꼬따'와 그 인근이었다. 그 곳에서 처음 돼지고기 '사떼'를 맛봤고, 아는 사람만 찾아가는 후미진 골목의 '미아얌'집에서 땀흘리며 밥을 나눠 먹었다. 천주교 신자인 그를 따라 자카르타에서 처음 성당에 가서 천장이 훌쩍 높은 서늘한 성당 안에서 그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봤다. 무엇을 기도했나 물으니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했다고 했다. 그의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한 자카르타의 주요 거리에서 작은 박스와 깡통을 들고 구걸하는 10살 전후의 아이들을 봤다. 아이들은 차가 다닐 땐 중앙분리대에서 기다리다가 빨간불이 되면 신호대기하는 오토바이와 자동차, 버스, 택시 주위로 몰려들어 뜨거운 아스팔트 열기와 자동차 오토바이 매연 속에서 사람들의 눈을 보며 손에 든 깡통을 내밀었다. 그럴 때마다, 요피는 헬멧 쓴 고개를 흔들었고 때로는 사회가 이래서는 안된다는 말을 했다.

그의 '이래서는 안된다'는 말을 또 들었던 것은 교통체증이 잦은 대로변 도로 보수+하수도 보수 공사현장을 지날 때였다. 헬멧 쓴 고개를 흔들며 요피는 '자카르타가 안그래도 막히는 줄을 알면서 평일 러시아워에 판벌리고 공사하는 게 말이 되냐'고 말했다. 그는 앞서가는 오토바이가 급정거를 하거나 무리한 커브를 돌 때, 끼어들거나 폭주를 할 때에도, 대로의 한 가운데가 움푹 파인 모습을 목격할 때에도 헬멧 쓴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늘상 조금 예민했고, 엄격했고, 취재와 기사로 고민에 빠져 있었으며 밤 늦게까지 텅빈 사무실을 지키며 전화인터뷰 대기를 했다. 농담으로 긴장푸는 <뗌뽀> 편집팀 사이에서도 그가 농담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진지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요피는 내가 무엇을 묻던 진지하게 답해주는 사람이었다. 자카르타에 온 지 두 달이 조금 지난 어느 날, 그는 나에게 기자로 성장하고 살아남기 위한 세 가지 기본기를 말해주었다. 취재원을 만날 때 같이 가 통역을 해줬고, 인도네시아어로 받은 인터뷰를 영어로 번역해줬고 취재원을 찾지 못할 때 함께 수소문했다. 그 과정 내내 한참 후배인 나의 취재 방향과 결정을 존중해줬고, 진지하게 지원했다.

그는 2012년 초, 인도네시아 재벌 중 하나가 인수한 온라인 매체 <더띡>으로 <뗌뽀> 기자 20여명이 대거 빠져나갈 때 함께 빠져나가며 <뗌뽀> 11년을 졸업했다. 나는 '가지 말라'고 했고 그는 '다른 선택이 없다'고 했다. 6개월 후 그는 야후메신저로 광주에 휴가 가 있던 나를 찾았고, 자카르타로 돌아와 만났을 때 '더띡 생활이 처음 의욕적으로 품었던 큰 뜻을 실현하기엔 거리가 있더라'고 했다. 그는 이상주의자였고, 언론혁명을 꿈꾸고 있었고 그 꿈을 재력/인력을 투자하는 <더띡>에서 이루고 싶어했다. 업계에서 손꼽히는 12년 경력의 기자가 품은 타협할 줄 모르는 이상적인 꿈들은 안타까웠고 아름다웠다.

끝내 <더띡>을 떠난 그는<콤파스TV>에서 뉴스팀장/프로듀서로 새로운 시작을 했다. 그는 회사를 옮긴 후 그토록 오랜동안 계획했던 조상의 고향 '중국'방문을 했고, 행복한 모습으로 <콤파스 TV> 일을 시작했다. '둥지' <뗌뽀>를 떠난 후 <더띡>에서 좀 헤맸지만 <콤파스TV>에서 제자리를 찾은 그는 자신감도 찾아갔다.

지난 7월 5일, 인도네시아 대선 후보간 마지막 생방송 TV토론 현장을 취재할 때 요피를 만났다. 당시 생방송 TV 중계를 맡은 <콤파스 TV> 현장 책임자로 나왔다가 프레스룸에 앉아 토론 내용을 모니터하던 나를 발견하고, 내 옆에 앉아 인사를 건넨 그는 마지막으로 만난 2013년 언젠가보다 더 여윈 모습, 언제나처럼 진지한 태도였고, 맨처음 프로클라마시에서 만난 2011년 9월 어느 날처럼 환한 미소로 나를 향해 웃었다.

Wednesday, June 25, 2014

리처드

리처드는 늘 산 미구엘을 마신다. 한 번 자리에 앉아 맥주를 마시기 시작하면 보통 4-5시간이다. 여럿이 어울려 마시는 것도 아니고 혼자 바에 앉아 자기 집 책상 앞에 앉아 맥북 들여다 보며 홀짝홀짝 마신다. 편집팀에 의하면 마감 직전에 잔뜩 술에 취해 사무실에 출근해 한참 헤롱대며 의자에 누워 잠을 자다가 일어나 순식간에 기가 막힌 제목을 뽑아내고는 밤샘 마감 후 판본이 인쇄소로 넘어가면 모두 퇴근한 뒤에도 한참 맥북 앞에 앉아 있다가 맥주를 마시러 간다. 팀 대부분이 그와 이야기할 때는 그의 영어를 알아듣기 어렵다고 말한다. 디카는 그가 말을 '먹으면서' 하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거의 못 알아듣겠다고 하고, 데브라는 그가 웅얼웅얼해서 역시 거의 못알아 듣는다고 했다. 데브라는 편집 중 그에게 확인할 것이 있어 전화 통화를 해야 할 때 그의 말을 알아 들으려 오케이 오케이 해가며 경청했지만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고 했다. 나도 맞장구치며 비슷한 '소통장애' 경험을 말했다. 그와 얘기할 땐 늘 pardon? sorry? what?이 내가 하는 말의 절반이라고 웃으며 과장해 말했다. 이 말을 듣던 데브라와 아만다는 즐거워 했다.

리처드는 뗌뽀에서 14년째 카피라이터로 일하고 있다. 그는 영국인이다. 고향이 어딘지, 언젠가 그가 산 미구엘 손에 들고 맥북 앞에 두고 스포츠 경기 중계 TV들이 벽벽에 걸린 스포츠맨 바에서 얘기해줬던 적이 있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에겐 기회가 되면 발리에 초대해 휴가를 선물하고 싶은 누나와 어머니가 있다. 지난해 그러니까 2013년 5월엔 드디어 누나와 어머니를 함께 초대할 수 있는 돈이 모아졌다고, 그는 설레며 나에게 말했는데 끝내는 어떤 사정에서인지 계획대로 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특별한 취미가 없다. 바나 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맥북을 붙잡고 음악을 듣든 동영상을 보든 기사들을 읽든 좋아하는 축구팀의 경기일정과 결과를 보든. 몇 년 전 7-8년을 사귀던 인도네시아인 여자친구와 헤어진 후 연애사도 심심한 것 같았다. 전'여친'은 스포츠맨 바에서 일하던 바텐더였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14년간 함께 주말마다 편집을 한 영어판 편집장 율리는 그를 자카르타에서는 잘란 작사 밖에 모르고 인도네시아어도 거의 하지 못하며 고향 영국에도 몇 년째 돌아가지 않으며 자카르타 밖이라고 가는 곳은 발리 뿐이라고 했다. 그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 건강이 안좋다는 등, 그는 거의 참석하지 않는 편집회의에서 여러번 말했다. 영어판 부편집장 헤르민은, 자주 편집 마감에 임박해도 전화가 불통이거나 행방을 알 수 없어져 팀을 패닉에 빠뜨리는 리처드를(그의 이름을 줄여 RB라고 부르는데) 이번주 마감의 '요주의 인물'로 지목한다. RB만 제 시간에 출근하면 문제가 없다는 말을 한다. 편집 마감 일정이 당겨지거나 특집기사 양이 많아 편집팀에서 비상이 걸리면 헤르민은 늘 RB가 관건이라며 그와 주로 소통하는 편집비서 데위에게 그에게 잘 설명하고 꼭 제시간에 올 수 있게 하라고 당부 또 당부다. 그런 이야기가 오가는 회의석에 앉아 있으면 RB는 이 팀의 대단한 골칫거리, 영원한 과제, 구제불능의 속썩이는 존재가 된다.

그러면 왜 그런 그와 일하는가. 자카르타에 영어원어민들도 많은데. 언젠가 율리가 말했다. "제목을 리처드처럼 뽑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는 그의 카피라이트가 늘 좋고, 결과물에 항상 만족한다." 이어 율리는 그가 어떻게 제목을 뽑는지, 표지문구와 사진, 일러스트레이션 고르는 최종 단계에 대해서도 말한 적이 있다. 그가 창의적이고 재기넘치는 제목 뽑기의 밑감으로 읽고 들여다 보는 것들, 참고하는 것들에 대해서. 마감 때마다 그의 옆자리를 지키는 데위는 그가 주간지 기사들이나 시사와 전혀 관계없는 몇 개의 디자인 사이트, 영감있는 홈페이지 등에 자주 들어간다고 했다. 편집팀에서 가까이 지켜본 사람들의 관찰을 종합하면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디어를 얻는 데 할애하며 아주 집중해 빠른 시간 안에 독자의 뇌를 깨우는 제목을 뽑아내는 카피라이터다.

그는 노란 테이프로 칭칭 감싼 무선 마우스를 쓰고 있는데 새것을 사다가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정향이 많이 들어가 단맛이 나는 유명한 토산담배 '구당가람'을 피운다. 그는 인도네시아에서 발행되는 두 개의 영어일간 자카르타포스트와 자카르타글로브에 대해, 자카르타글로브는 에디토리얼 빼고 볼 게 없다고 잘라 말했고 자카르타포스트에 대해선 그저 괜찮은 신문이라고 두루뭉술 넘어갔다. 그가 매주 편집회의에 나오지 않는 이유는 가장 중요한 그 주 발행호의 전체 편집방향과 레이아웃, 표지이야기와 표지의 문구/제목/디자인 등에 대해서는 정작 단 한 번도 논의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회의에선 실리게 될 기사만 선별하고 발제하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 (140115 JKT 아침)

뗌뽀 영어판 제1444호가 나온 이번주까지, 1444개의 놀라운 표지 제목을 뽑아오고 있으며 누구도 리처드 없는 뗌뽀 영어판을 생각하지 못할 것 같다. 그는 뗌뽀가 아직 잘란 프로클라마시 72에 있던 시절, 마감 한창인 편집팀 중간에 앉아 멀뚱거리던 자카르타 2주차 한국인 인턴기자에게 두꺼운 치즈만 넣은 호밀빵 샌드위치를 건넸었다.

Monday, January 06, 2014

위르요 아저씨

1년 2개월째 살고 있는 자카르타 남부 위자야 띠무르 집 관리인 위르요 아저씨는 부유함의 냄새를 맡으면 웃는다. 눈 앞에, 좋은 것 그러니까 돈으로 환산해 값이 나가는 것을 보면 만면의 미소와 함께 구하지 않은 친절을 행동으로 옮긴다. 돈 앞에 충성을 보이는 그런 물신의 전형 같다는 생각을 했다. 관리인이긴 한데, 도대체 뭘하고 월급을 받나 좀 의아할 때가 있다. 좋은 새 차 보고 '새차 샀냐'고, 새 자전거 보고 '자전거 샀냐'고 환하게 웃는 목소리로 묻던 사람이 정원 나무 잘라놓은 걸 보면 놀란다. 놀라울 건 아닌가.

그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집청소를 한다. 물론 집안 쓰레기통 안과 밖에 쌓인 쓰레기를 내다버리는 일이나 테이블, TV, 책 선반 등에 쌓인 먼지를 닦는 일은 거의 없지만. 새 입주자가 들어 올 방에 페인트 칠을 해야 한다거나 에어컨 청소를 해야 한다거나 이런 것들을 제깍하는 것은 또 신기하다. 그렇게 쉬엄쉬엄 좀 놀다가 비오고 해 내리쬐고 다시 비오고 해 내리쬐는 날씨가 반복되는 통에 정원이 금방 정글이 되면, 가지가 자랄 만큼 자랄 때 까지 방치하다가 정원 나무를 인정사정 없이 잘라버리는데, 결과물은 '미는 뭐고 조경은 뭐냐' 하고, 잘라냈을 것 같은 모양이다. 그가 잘라버린 가지 많던 나무-키가 작지만 가지와 잎이 무성해서 내 방 침대쪽 창의 한낮 햇빛을 가리던 그 가지 많던 나무의 헐벗은 모습과 잘린 단면들을 보면, 목욕은 일년에 한 번 하는 구정물 흐르는 아이가 막 머리 밀고 목욕한 것처럼, 눈에 띄게 멋쩍다. 위르요 아저씨가 가지를 쳐낸 위자야 띠무르집 정원 나무가 만화 속에 나오는 캐릭터라 치고 내 눈엔 그 나무 위로 말 풍선이 그려지는데 이런 거다. "헐..... 잘라도 이렇게 자르냐......" 
지난 토요일 블록엠에 영화 <수까르노> 보러 다녀오는 길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가로수 정비하는 중이었던지 길가에 잘린 가지들이수북했고 인부 아저씨들이 잘라낸 가지들을 이동의 편리와 부피줄이기를 위해 다시 낫같은 칼로 자를 때 풍기던 짙은 나뭇잎, 나무 냄새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정원이 있는 집에 사는 것은 좋은데 가지 잘라서 나는 짙은 나무냄새가 꼭 생각없는 사람이 휘두른 칼에 이유없이 죽은 사람의 피냄새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