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November 29, 2012

비자유감

드디어 끼따스 여정이 끝나간다. 인도네시아에 와서 가장 골치 아팠던 것이 매달 비자연장하는 것이었다. 관광비자, 방문비자, 사회문화비자까지 골고루 거쳤다. 연장하는 날이 올 때마다 마감 날짜 맞춰 서류 만들고, 접수하고 언제나 속이 타들어갔던 것 같다. (어딜 가나 내 속 태우는 건 마감이로군) 어찌 되었든 공식적으로 나는 어떤 회사에도 고용되어 있지 않은 외국인이니 비자 문제가 골치거리일 수밖에 없는 거다. 비자비자비자, 국경없는 세계화니 세계는 하나니 해봤자 나처럼 힘없이 혈혈단신 넘어온 이주노동자에겐 도대체 와닿질 않는 거다. 지금까지 큰 고생을 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비자처럼 절박하고 나를 우울하게 만든 건 없다. 비자 걱정을 해야 하는 우울한 상황이 올 때마다 책상에 앉아 밤하늘을 보면서 가만히 생각을 했는데, 나름의 위안은 이런 거였다. '아, 이땅의 많은 이주노동자들, 전세계 인구의 3%(국제이주기구와 OECD 2005년 통계로 1억 9천만명, 2050년에는 2억 3천만명 예상)나 된다는데, 이들의 현실과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지긋지긋한 스트레스를 벗어나기 위해 무리를 하고 시간과 돈과 정력을 써서 취업비자 끼따스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freelance journalist'라는 나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하여 보통의 절차보다 더 많은 시간과 돈과 정력이 들어갔고, 이 안정적인 visa status를 유지하는 데도 여러모로 노력과 비용이 들어갈 거다.

외국에서 돈을 벌어가려면 그 나라에 세금을 내야 하고, 대가를 지불해야 하고 당연한 건데, 그래서 그럼 개별 이주노동자들이 돈을 벌 만큼 벌어가느냐, 비자로 썩는 골머리와 맘고생과 시간과 비용과 정력에 상응할 만한 보상이 있느냐, 따져보건데 절대로 아니라는 거다. 한국에 와있는 동남아-중국 이주노동자나 말레이시아 싱가폴에 가있는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나 다들 그런 고생을 해서 돈을 얼마나 버느냐, 그런 걸 생각하기 시작하면 우울하다. 그들을 취급(?)하는 문화도 우울하고, 그들이 벌어가는 쥐꼬리만한 돈도 우울하고. 도대체 그 많은 돈은 누가 벌어가느냐, 금융 투자 사업하는 자본가나 기업가 그들 돈 벌어가도록 챙겨주는 정부 아니겠나. 자본과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이 필요한 건 사실은 개별 노동자가 아니라 돈 굴리는 사람들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어차피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인도네시아에 온 것이 아니므로, 그러나 생존을 위해서는 수입과 지출의 수지가 맞아야 하는 것은 분명한 가운데, 이런 것들을 따져볼 수 밖에 없는 거다. 아주 잠깐은 내가 취업비자를 받아 비자안정권에 들면 이런 이주노동 공감대를 잃어버릴까 걱정했는데, 그럴 일은 없겠다.

이럴 수록, 비자문제로 맘쓰고 돈쓰고 할수록, 더 강해지는 질문은 '인도네시아 왜 왔니'다. '뗌뽀에서 일을 배우고 싶다'던 유일한 목적이 다음 주자로 바통을 넘겨줘야 하는데, 아무리 손을 내밀며 달려가도 다음 주자가 선뜻 손을 뒤로 내밀지 않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왜 왔니' 바통은 점점 더 민망해지는 것이다. 계주는 계속되어야 하는데. 혼자서 끝까지 달릴 수 없는데. 주변에서 쏟아내고 내 안에서 쏟아내는 수많은 당위와 의무에 질식하기 전에 가볍게 달릴 수 있을 때 알아서 바통 받자. 곧 12월이다.

그렇고, 말도 안되는 인도네시아어로 그것도 전화로 흥정을 해내다니 참 나도 놀라운 뻔뻔함을 발견했다. 거래와 협상을 말로만 하는 건 아니구나. 협상력이란 이런 거네. 유레카.

Saturday, October 20, 2012

여자의 일생

아무 생각없이 관찰하던 관계들 속에서 여자의 일생을 생각했다. 모파상의 그 유명한 이야기를 떠올리겠지만.

여자가 남자와 함께 있을 때, 관계 안에 있을 때, 둘의 거래는 매춘을 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그런 의문이 진심으로 생겨난 밤이다. 여자에게 결혼은 경제적 생존의 문제고 선택이라던 2년 전의 대화와 2주 전의 대화가 오늘 저녁 한국식당에서 겹쳤다. 동등한 부부가 아니라 집안의 얼굴 마담으로 남편의 여자로, 손님이 찾아오면 웃으며 응대해야 하고, 불편한 자리나 편한 자리나 자기 선택과 관계없이 나가야 할 자리면 친절한 웃음을 쓰고 나가 앉아 자리를 지켜야 하는, 진심이 아닌 웃음을 웃는 것은, 얼마나 씁쓸하고 불쾌한 일인가. 이게 성노동자의 삶과 무엇이 다른가. 직접적인 성관계를 매개하는가가 성노동과 매춘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자의 웃음을 파는 것, 여자의 상냥한 배려와 태도를 기대하는 남자들에게 그것을 주는 것도 성노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남자가 일방적으로 기대하는 여자의 성역할을 채워주는(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것, 그것도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일종의 매춘이라고 생각한다. 혼인 관계에 있는가 연인 관계에 있는가 같은 공식적인 이름표는 중요하지 않다. 남자가 경제적 몫을 지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한 여자의 성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면 부부관계라도 매춘 아닌가.

그동안 몇몇 남자들을 만나면서 느꼈던 찝찝함이 무엇인가 따져보니 오늘에야 답이 나왔다. 나는 매춘을 하고 있었던 거다. 나는 웃어주고 상냥하게 챙겨주고 그를 기쁘게 하면, 그는 돈을 지불하는 것.

그런 게 여자의 일생이라고 소설로 이론으로 까발렸던 게 언제 적인데 아직도 일상에선 달라진 게 없다. 무감각해서 그렇다. 여자의 일생이 남자의 정서적 신체적 만족을 위한 여성으로서의 성역할에 그쳐서 되겠니. 제3의 성도, 제4의 성도, 그 어떤 혁명적인 성개념도 일상의 무감각을 먼저 넘어서지 않으면 안된다.

Monday, August 13, 2012

자카르타 2막 1장, 2012 Ramadhan

두 달 반만에 돌아온 자카르타는 라마단의 끝을 기다리고 있다. 일부러 광주에서 쪄온 살을 빼야겠다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7일 오후 4시 가루다 인도네시아로 도착한 이후 하루에 한 끼 잘 챙겨먹으면 다행이다. 일단 거리 어디서나 볼 수 있던 손수레 밥집들이 없다. 특히 주택가가 그렇다. 대형 쇼핑몰을 가면 무슬림이 금식해야 하는 해 뜬 시간이라도 골라서 밥을 먹을 수 있지만. 그래도 주문받고 서빙하는 무슬림들에겐 미안한 노릇이다. 매일 저녁 6시 하루 금식이 끝날 때, 택시 안에 있으면 미안해 어쩔 줄 모른다. 6시가 금식종료인지 모르고 있다가 Jl. Melewai에 있는 씨티은행 ATM에 들렀다가 그 곳 주차도우미 아저씨가 알려줘 알았다. 택시 기사 아저씨는 내가 은행업무를 보는 사이 근처 가게에서 빵과 물을 사왔다. 6시에 가까울 때 앙꼿을 타도 기사아저씨에게 미안하고, 라마단 기간 밤 늦게까지 2시간이나 운전해 집까지 데려다 준 지인의 운전기사에게도 미안하고. 라마단 기간에는 운전기사들 신경이 특히 날카로워진다는 말도 생각났다. 반둥에서 한 앙꼿 기사 아저씨는 이둘피트리(금식이 끝나는 명절)가 7일 남았다고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주말을 보낸 반둥에서도 그랬다. 머물던 친구집 근처에 바소미(쇠고기나 닭고기 혹은 생선 완자를 넣은 국수)가게가 있는 것을 보고, 내일 아침 산책 갔다오는 길에 먹어야 벼렀는데, 아침에 가니 문을 닫았다. 동네에 음식이고 물이고 먹을 곳이 하나도 없다. 앙꼿을 타고 중심가로 내려와서나 식당이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처음 기차여행을 했다. 반둥역-자카르타 감비르역까지 기차를 탔다. 3시간 정도의 여정이다. 반둥역에서 기차표를 사고, 첫 끼니를 위해 역사한 식당에 갔는데, 역시 미안했다. 그래도 너무 배가 고파서였는지, 몸과 마음의 태도가 달라져서인지 음식이 참 감사하고 맛있었다. 개념이 생겨서 이제는 기차 안에서도 물 마시는 게 눈치보였다. 통로 사이 옆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가 무슬림이었던 걸.

감비르역에서 집까지 transjakarta를 세 번 갈아타고 왔다. 꼭 1시간 40분이 걸렸다. transjakarta는 자카르타 전역을 연결하는 시내버스인데, 노선 번호는 없고 구간과 구간을 연결하는 종합역들이 자카르타 중심부에 모여있다. 3500루피아로 횟수 제한없이 갈아탈 수 있다. 이걸 두고, 지난 7개월간 줄곧 택시를 타고 다녔다. 값이 싸고 노선 번호 따지는 번거로움이 없는 대신, 역에서 버스를 오래 기다리다 지친다. 일요일 한 낮이라 시내 어디나 길이 막혔고, transjakarta는 전용도로가 있어 러시아워에도 교통체증 걱정이 없는 게 정상인데, 길이 막힐 땐, 차들이 난입하기도 하고  어떤 구간은 전용도로가 없다. 그러니까 transjakarta라도 막힐 땐 막히는 거다. 날도 뜨겁고,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고, 기다리기 지루하다... 할 때쯤 senen역에 있던 아가씨가 쓰러졌다. 금식 중인데 너무 뜨겁고 지쳐서 잠시 실신한 것 같았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눈이 쏠렸다. 무슬림여자들이 가방에서 꺼낸 물을 건넸다. 경찰도 오고 역사 관계자도 왔는데, 크게 당황한 기색은 아니었다. 쓰러졌던 여자의 오빠 혹은 남자친구로 보이는 남자만 혼비백산. 여자는 금방 정신도 기운도 차렸다. 해가 떠있으면 물도 음식도 먹지않는 금식 기간, 더운 동남아시아 건기에 쓰러지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다. 금식을 하면서도 쓰러지지 않는 것까지 계산되어 있는 건가.

집 앞 간다리아 몰에 장보러 간 시간은 저녁 5시쯤. buka puasa(금식을 깨고 음식물을 섭취할 수 있는 시간)이 가까워 저녁을 먹으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 식당엔 웬만하면 자리가 없다. 가족단위 예약이 다차서. 라마단 기간 외식이 늘어 음식 소비량이 평소의 두배 이상 치솟는다더니. 외식업계는 라마단 특수다. 롯데마트는 의외로 한산했다. 장보러 온 사람들 중 히잡을 쓴 사람은 마트 직원 외에 거의 없었다. 그 시간이면 buka puasa를 해야지 식재료 장보진 않겠지. 손님은 대개 중국계 등 비무슬림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무슬림이 전체의 88%정도라지만, 내 주변엔 천주교신자인 인도네시아 사람이 꽤 많다. 무슬림이라도 금식하지 않는 사람도 많고. 금식하는 무슬림 친구들은 낮에 기운이 없다. 덩달아 나도 하루에 한끼 먹으며 낮엔 기운이 없다. 오늘 아침이 와서 커피도 마시고 뜨거운 흰밥도 먹고 싶은데, 곁의 친구에게 미안해 그냥 굶고 말았다. 지난 달부터 반둥 빠자자란 대학에서 국제관계학 석사과정에 들어간 친구는 라마단 기간엔 밤에 잠이 잘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 친구네 집에 보낸 첫날, 배가 고파서 나도 밤에 잠이 안 왔다.

곧 인도네시아 독립기념일(8월17일)과 이둘피트리(8월19일)이 다가오므로 나도 막차 타고 금식 대신 소식하기로 했다. 라마단이 끝날 때까지는 저녁 6시를 대비해 무슬림 친구들이나 택시기사 등등을 위한 사탕을 좀 가지고 다녀야겠다.

Tuesday, May 15, 2012

밤 2

아직 잊지 못한 사람이 있는데, 새로운 사람이 온다. 그런 경험은 반복된다. 충분히 생각하고 싶은데, 또 새롭게 생각해야 할 것들이 밀려온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는 밀물과 썰물. 내 마음은 내 몸은 내 일상은 그저 늘 철썩하고 싸하고. 모래가 함께 밀려나갔다가 밀려왔다가. 깎이는 듯했다가 다시 차올랐다가. 자까르따에 온 뒤로 나는 파도가 바삐 오가는 해변이 됐다. 혼자 있을 시간이란, 온전히 시간을 무시한 상상의 시간 뿐이고 그래서 느끼는 완전한 자유로움은 꿈 속에 있다. 그래서 잠자는 시간이 소중하다. 잠자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일상은 매일 시간과 투쟁을 한다. 밤에도 낮에도 바닷가엔 파도가 밀렸다 빠져나가지만, 밤바다의 어둠은 견딜만 하다. 모두가 해맑게 웃고 떠들며 뛰놀고 물장난을 하는 넓은 바다, 혼자인 법은 없지만 파도를 피할 수 없는 바다. 밤이 되면 나는 내가 아니고, 내가 그리워하는 것, 내가 상상하는 것,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된다. 

Monday, May 14, 2012

밤 1

그는 밤마다 사무실에 혼자 남아 음악을 듣는다.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후 사무실에 늘 빵빵한 스테레오 스피커에 멋진 음악을 걸어놓는다. 3층에 있는 내 자리에 올라올 때 지나와야 하는 1층 기록관리팀은 낮엔 더없이 차분하고 착실한 공간. 퇴근 시간이 지나 어둠이 내리면 감성이 열리는 공간. 늘 혼자 웃음짓기만 하다가, 오늘은 디카 안똔이랑 삼겹살을 먹고 혼자 1층을 지날 때, 그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그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수줍게 화답했다. 낮동안엔 음악 듣고 싶어서 어떻게 참나. 늘 좋은 음악이 있다. 그는 음악을 듣기 위해 집에 늦게 가는 걸까? 교통체증을 피하려고 밤을 기다리는 걸까? 그의 순박한 미소가 긴장된 마음을 녹였다. 한숨짓고 긴장됐던 하루가 밤으로 도망친다.(120514 JKT)

(150104 JKT) 일요일 오후, 2015년 첫 월요일 신문 준비를 위해 출근한 그의 스피커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Heal the World'가 흘러나왔고, 나는 처음으로 그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고 'Good Music'이라고 말했다.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Saturday, March 24, 2012

여행은 일상의 축소판

2주 동안 인도에 다녀왔다. 휴가라고 말하면 다들 holiday to india??? 하고 반문했다. 휴가는 발리나 푸켓 같은 휴양지로 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질문에 있었다. 많은 물음을 안고 갔는데 많은 답도 얻어가지고 왔다. 여행은 일상을 압축해놓은 축소판인 것 같다. 좋기만 하지도 나쁘기만 하지도 새롭거나 익숙하거나, 어느 한쪽에만 나를 두는 일이 없다. 이번 여행에서는 말하는 것이 참 어색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렵고 만남에 지친 상태에서 떠났는데,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람을 만나는 것으로 여행은 귀결됐다. 온 우주가 너무 벅차도록 거대하다는 생각이다. 작고 소박하게 살았으면 싶은 마음과 달리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가 한꺼번에 빠져나간다. 모든 종교에서 인간을 소우주로 보는데, 대우주도 벅찬 나에게 대우주의 축소판인 소우주들을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은 즐거운 동시에 상당한 피로감을 남긴다. 격식을 갖춰 제대로 만나고 마음을 다해 존중하는 만남과 헤어짐을 추구하다 보니, 만남 자체가 스트레스고 부담이다. 자카르타 생활 6개월이 지난 2주간 인도여행에 또렷한 상으로 드러났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만남에 대한 반가움과 두려움이 한 데 뒤섞였다. 매일 잘 곳, 먹을 곳을 고민해야 하고,비자든 버스표든 약속된 곳으로 가기 위해 수고를 겪어야 했다. 또 한 가지 발견한 것은 내가 시간에 쫓기는 조급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환경에서도 나는 불안해 했다. 우다이뿌르 피촐라호수의 야경을 바라보며 내가 얼마나 자유로운가 하는 것을 경탄하는 것은 상상에서 되려 더 달콤했다. 실제로는 사색이나 여유가 어색해 뭔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지나온 일들과 다가올 일들을 생각하느라 바빴다. 멍 때리며 한 곳을 응시하는 일은 겨우 10분을 넘기지 못했다. 그런 내가 조금 서글퍼졌다. 아무도 쫓아오는 사람이 없는데 혼자 쫓기는 것은 나만의 사정은 아닐 것이다. 그런 와중에 함께 밤하늘을 보거나, 맥주를 마시거나, 길을 걷거나, 그늘 아래 쉬거나, 길거리 야식을 먹으며 낯선 이와 함께 수다를 떨거나, 황당한 상황에 함께 실없이 웃거나, 추운 밤바람을 맞으며 오토릭샤 안에서 말없이 밤을 맞이한 길동무들이 있었다. 인간은 경이에 차서 죽는다는 카뮈의 문장이 유난히 와닿는 까닭은 내가 불확실한 경이로움을 찾아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때문이다. 놀라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되는 나의 경험체계는 나를 끊임없이 불확실 속으로 끌고간다.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는 것을 누군가는 자유라고 읽고 누군가는 불안이라고 읽는다. 자유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어느 순간에는 불안해 할 수 있다. 무를 유로 볼 수 있는 힘, 흘러가는 모든 것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간직하는 담대함 같은 것을 위하여 나는 여행을 한다고 해두자. 하루하루 의미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생각하면서 나를 깨울 수 있다는 것, 그리움을 숙성시키는 것. 내게 여행의 의미는 그런 것 같다고, 아흐메다바드에서 뭄바이로 가는 밤버스 안에서 트윗했다. 겨우 2주 떠나있다 돌아온 자카르타는 몰라보게 낯설다. 말도, 날씨도, 사람도, 내가 살던 집까지도 낯설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가? 질문은 2막으로 던져졌다.